타이또는 1010년 송나라에 즉위하자마자 조공을 바쳐 송 황제에게 교지군왕(군주)으로 책봉되었다. 이 관계는 송과의 국경 갈등과 전쟁을 포함해 1084년 협상으로 안정되었으며, 다이비엣은 송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타이또 즉위와 송나라에 조공
1010년, 다이비엣(베트남)의 황제인 타이또가 즉위하자 송나라에 조공을 표하며 송 황제에게 상아, 무소뿔, 코끼리 등을 공물로 바쳤다. 이로써 타이또는 송 황제로부터 교지군왕(군주)으로 책봉되었다. 이 관계는 다이비엣과 송 사이의 국경 갈등과 전쟁을 포함해 여러 번 협상을 거쳐 안정을 찾았다. 1084년 협상에서는 송과의 국경이 정해지고 양국 간의 조공 관계가 유지되면서 다이비엣은 송에게 땅을 양도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했다. 이후 송과의 분쟁을 최소화하며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교지군왕으로의 책봉
교지군왕(交趾郡王)으로의 책봉은 다이비엣(베트남) 황제인 타이또가 송나라와의 외교적 관계에서 받은 특별한 지위를 나타낸다. 1010년에 즉위한 타이또는 송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송나라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로 교지군왕에 책봉되었다. '교지군왕'은 중국에서 행정구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군(郡)은 송나라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을 나타내며, 왕(王)은 군을 지배하는 지역 지배자를 지칭한다. 이는 송나라가 다이비엣을 송의 관할 지역으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하며, 다이비엣이 송나라의 종속적인 입장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다이비엣은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국경 갈등과 전쟁을 피하며 독립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고,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송과의 관계 유지 노력
다이비엣(베트남) 황제인 타이또는 리 왕조(1010~1225)는 송나라와의 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을 펼쳤다. 타이또는 1010년에 즉위하자마자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 교지군왕(交趾郡王)에 책봉되었다. 이는 송나라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군(郡)은 송의 지배 구역을 나타내고 왕(王)은 다이비엣을 지배하는 지역 지배자를 지칭한다. 이 관계는 송나라의 영향 하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리 왕조는 독립을 유지하며 송나라와의 갈등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1072년에 즉위한 년똥(똥) 황제는 송나라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송 황제에게 조공을 보내 교지군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적대적인 태도와 국경 지역에서의 갈등으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리트엉끼엣(녕양기역)에게 10만 대군을 투입하여 송나라의 국경 도시를 공격했지만, 송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해야 했다.
전쟁의 장기화로 송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다이비엣은 송나라에 일부 영토를 양도하고 국경을 정해놓는 협상을 통해 송과의 관계를 안정시켰다(1084). 이후 3년 또는 4년마다 조공을 바쳐 송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다이비엣은 독립을 유지하면서 송나라와의 외교적인 연결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리 왕조가 중국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송나라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경 갈등과 송의 음모
11세기 중반, 다이비엣(베트남)은 중국 송나라와 국경 지역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타이또 황제(년똥)는 1072년에 즉위하자마자 송나라에 조공을 보내 송 황제의 지위를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국경 지역에서의 민족 간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송 황제의 속국 통제 의도를 부추겼습니다.
1075년, 년똥은 송나라의 국경 도시를 침공하려는 선제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리트엉끼엣(녕양기역)에 10만 대군을 보내 송나라를 공격했으나 송 황제의 반격에 직면해 홍강 북안에서 패배하고 철수해야 했습니다. 이 전투는 양국 간의 국경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송나라는 다이비엣을 속국으로 통제하려는 음모를 품었습니다.
다이비엣은 송나라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응하면서 외교적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1084년, 양국은 국경 문제를 해결하고 양측의 영토를 정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일시적으로 양국 간의 갈등은 진정되었지만, 송 황제의 다이비엣 속국화 의도는 여전히 존속했습니다.
1126년,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하고 수도 변경을 점령하는 등 송나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송 황제의 아우는 양쯔강 이남으로 피신하여 임안에 왕조를 재건했지만, 이는 송나라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송 황제가 중국 본토를 잃음으로써 다이비엣은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의 음모와 갈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